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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민트존 시리즈9 [들뢰즈(G. Deleuze)로 욕망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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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근무 작성일18-03-05 15:03 조회3,1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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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민트존 시리즈9

제목: 들뢰즈(G. Deleuze)로 욕망 다시 읽기

글쓴이: 이근무(HA연구소장)

 

타율이 저조한 프로야구 선수가 있습니다. 득점 찬스가 되자 감독은 그를 대신하여 대타를 내보냅니다. 선수는 감독에게 하소연합니다. “모든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다. 행간의 숨은 뜻을 풀이하면 나도 안타를 치고 싶다. 말리지 마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야구선수의 말처럼 인간의 역사는 욕망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신화와 전설의 가장 오래된 주제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이블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취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가져다 주고 싶은 욕망을 지녔고 판도라(Pandora)는 인류의 비밀이 담긴 상자를 열고 싶어 했습니다. 이카로스(Icarus) 역시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을 지녔습니다.

 

성경과 신화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욕망을 성취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낙원에서의 추방, 끔직한 재앙, 형벌, 추락이였습니다. 욕망의 이러한 이중성 때문인지 철학자들은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절제 또는 욕망의 승화를 요구합니다.

 

타자의 윤리학자로 지칭되는 레비나스(E. Levinas)는 욕망을 단순한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망(Metaphysical desire)으로 분류했습니다. 전자는 개인의 존재 보존과 발전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자신을 넘어 타자의 고통을 떠맡고 그들에 대해 관심과 배려를 하고 종국에는 무조건적인, 즉 아브라함적 환대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드(S. Freud)역시 욕망(Drive)을 인정하면서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비의적 개념체를 통해 욕망을 억제하고 질서와 권위를 내면화함으로써 순치되어 가는 인간의 삶을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욕망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금단의 영역속에 위치하고 있기에 욕망 앞에서 인간은 군침만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맹자의 공손추(公孫丑)편에 나오는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 감히 두려워 청할 수는 없지만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란다)이라는 고사가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니체(F. W. Nietzsche)역시 욕망 앞에 주저하는 인간을 푸줏간 앞의 개로 비유했습니다. 즉 푸줏간 안의 고기가 탐나지만 주인의 칼이 무서워 배회하는 개의 형상을 초인(Ubermensch)이 아닌 범인(Dasman)의 존재양식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니체 철학의 재해석자로도 불리는 들뢰즈(G. Deleuze)는 기존의 철학자들처럼 욕망을 결핍, 또는 관리기술로 보지 않고 창조와 생산의 원천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키기 위해 욕망하는 기계”(machine desirante)라는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들뢰즈에 의하면 기계는 아무런 목적도 윤리의식도 없이 생산만을 반복할 뿐입니다. 제품이 과잉생산되도 기계는 여전히 작동하고 고장이 나도 기능합니다. 고장난 기계의 부품을 교체하고 수리를 하면 이전보다 더 잘 작동하는 경우가 있듯이 욕망이라는 기계는 자기가 유발한 위기와 모순을 먹고 더욱 성장하기도 합니다. 들뢰즈의 욕망개념은 인간의 무한하고도 때로는 파괴적인 욕망을 찬양하는 윤리적 무정부주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욕망에서 생성의 조건을 보라는 의미에서 욕망하는 기계개념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이같은 모순은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모순적 공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류의 대속자, 평강의 왕이라 지칭되는 예수는 경천동지할 말을 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니라”(신약성서, 마태복음, 1034~36).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다수는 예수의 사역으로 인해 새롭게 인간들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불협화음 때로는 전쟁 등으로 해석합니다.

 

기독교 발전사에서 나타난 박해, 순교와 같은 것들이 예수사역의 또 다른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 역시 욕망의 무한한 팽창 그 자체가 아니라 욕망 추동의 결과로서 야기된 또 다른 생성을 포착할 있는 사유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적연구자들이 접하는 연구참여자들 중 많은 경우가 욕망에 매혹된 사람들입니다. 가톨릭교부 신학자들이 모든 죄의 근원으로서 지목한 일곱가지 대죄(septem peccata mortalia), 즉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 이 모두가 욕망과 관계되어 있고 질적연구자들이 많이 다루는 중독, 폭력, 편견, 차별, 황금만능주의, 가족해체 등의 주제가 역시 욕망과 관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욕망을 다룸에 있어 그것을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욕구와 구분하고 또한 욕망의 끝을 파멸로 미리 간주하여 욕망은 파멸로 귀결된다는 단선적인과론에 입각하여 기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욕망에 대해 절제라는 도덕율적 권면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향은 질적연구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질적연구는 발견적 연구입니다. 따라서 주류관점에서 보면 일탈적이고 때로는 비정상적인 욕망을 옹호하고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결과로 나타난 또 따른 생성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학교 밖 창소년들이 학교 밖이라는 공간에서의 일탈과 방황을 보는 동시에 그들에게 새롭게 생성된 인식이나 삶의 정향, 가족을 외면하고 도박이나 알콜중독이라는 욕망의 끝을 향해 치닫는 개인들이 욕망추구 과정에서 나타난 자기반성이나 가능성, 이외에도 자살, 쇼핑, 일 등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무수한 욕망, 그 욕망의 끝에 대한 기술이나 도덕적 판단보다는 욕망과 욕망의 중간 또는 욕망의 끝에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틀을 생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을 선과 악, 무기(無記)로 구분합니다. 이 중 무기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선악 중의 어떠한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것을 지칭합니다. 필자는 욕망 역시 선도 악도 아닌 무기라 생각합니다. 무기적 사유는 끊임없는 생성의 연속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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